서로라는 자유의 자리에서 우리서로 사랑합시다.
부활 제6주일 – 나형성(요한세례자)신부님
제1독서 사도행전 10,25-26.34-35.44-48 / 제2독서 요한 1서 4,7-10 / 복음 요한 15,9-17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친구란 명령하는 Comando(코만도)가 되는 것이 아니죠. 또 사랑은 억지로 시켜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이미 주님은 잘 아십니다. 그럼에도 명령 이라 하신 것은 무엇보다 하느님 아버지의 명령 자체이신 당신을 육화되신 사랑 이신 당신을 그대로 건네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이는 위압적인 명령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하는 사랑에로의 부르심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품에 있는 우리에게 기쁨의 우선순위가 세상의 기대여부나 또 잘 보여지는 조화요 수치에 따른 것이 아니라 진정 너 너와 세상을 위한 사랑의 실천에 따른 기쁨임을 강조하시고 또 그것이 가능하도록 사랑 명령 자체이신 당신을 건네 주십니다.
“네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또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충만한 기쁨의 길로서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두 번이나 “서로 사랑하여라” 하시죠 12절과 17절 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 많이 사랑해라, 열심히 사랑해라, 혼자서 사랑해라 그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서로 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알렐로스 인데 상호대명사입니다. 여기서는 목적격으로 씌여서 “서로를” 이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내 제가 어저깨 찾아본 거라 검증은 더 필요합니다. 따라서 이 말은 서로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나 소유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여기 있는 너로서 교류함을 의미합니다.
조금 더 문맥적으로 보자면 너를 바라봄 너에게 향한 상태 또 상호호혜성을 지닌 부대낌 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언제고 이 서로, 이 서로는 상대의 내적 현실에는 관심도 없고 일방통행이 되고마는 또 불평을 늘어놓고마는 관계로 흘러갈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나오죠 “서로 수근 거렸다.” “서로에게 수근 대다” 그러나 주님의 이 말씀 안에 이 서로 라는 것은 단순히 Give in Take(기브인 테이크) 주고 받음에 의미가 아니라 상대방을 또한 나처럼 사랑받고 또 사랑할 수 있는 주체로서 인정하고 또 거기에 나를 더 구체적으로 열어두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주님께서도 분명 거부된 사랑을 체험하셨죠 그럼에도 끝까지 열어 두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친구야 네가 하려는 일을 하여라” 친구 유다를 바라본 그 마음이 어땠을까 잠시 헤아려 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친구가 되어 주셨듯이, 계급의 힘이나 그 계급의 논리가 아니라 사랑의 실체인 주님의 말씀에 우리가 마음을 두고 서로를 주님의 마음에 맡기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이는 사실 우리의 기도에서도 마찬가지이죠. 그와 마찬가지로 삶에서도 너와나 서로에게 성령이 움직이시겠끔 우리 어깨에 힘을 내려놓는 온유함 또 그리고 또 우리 어깨에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애정어린 관심 이것을 동시에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에서도 삶에서도 어깨에 힘을 빼는 것 또 나의 어깨에 애정어린 관심의 십자가를 지는 것
이러한 우리의 신앙안에서 예수님은 분명 사랑하려는 우리에게, 우리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십니다. 그리고 당신 사랑의 방식을 알려주시지요. 이는 힘을 겨루는 서로가 아니라 성부와 아들의 관계가 중심에 있는 서로입니다. 신앙이란 나의 능력으로 해내는 메시아콤플렉스같은 영적인 중이병도 아니고, 자기 신념으로 무리를 짓는 영적 치매상태도 아닙니다. 그리고 사랑이란 너가 나를 위해서 이미 잘 준비되어 있기에 친구로 받아주는 그런 서로됨이 아니지요 여기 신학교에서, 교회에서 사랑을 말하는 우리 안에, 우리 안에 만일 주님께 뿌리를 둔 이 서로라는 자유의 자리가 없다면 전체주의적 폭력이 되거나 또 끼리끼리의 악취미들이 서서희 우리의 섬세한 마음과 양심을 해치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의 서로에는, 언제나 하느님의 서로 사랑하심이 생동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때 내 마음에 불이 놓이고 변화함과 동시에 너를, 너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곧 너가 자유로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임을 더 깊이 인정하게 되는 것이지요 분명 우리 안에는 나만이 아니라, 주님으로 인해, 너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임을 느끼는 이 놀라움이 있어야 합니다.
“할례받은 신자들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것, 우리가 살 수 있음에 이 가능성은 바로 사랑의 육화, 아버지의 명령 자체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친구 되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독서 말씀이지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주셨습니다.”
오늘 하루 이 은총의 성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에 일치한 친구가 되고, 주님의 서로 사랑에 물들었으면 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쁨을 전했던 사도들의 모습처럼 여기 서로를 하느님 안에 서로로서 놀랍게 바라봅시다. 하느님의 백성의 실체가 이를 통해 세상 속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나야할 시간입니다. 서로라는 자유의 자리에서 우리서로 사랑합시다.
2021년 5월 9일 촬영 / [출처:https://www.youtube.com/watch?v=eq68NvCJF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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